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고둔 사건 (문단 편집) === 장쉐량의 회고 === 1991년 12월 10일, [[NHK]]와의 인터뷰에서 장쉐량은 "나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죽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내 부하는 아버지가 부상을 당해 봉천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전해주었을 뿐입니다. 게다가 나는 당시 북벌에 대비하기 위해 베이징에 있었고, 군을 이끌 책임이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즉시 봉천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부하가 아버지의 죽음을 처음부터 알려주었더라면 나는 곧바로 봉천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 꼭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일본군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때 일본이 아버지 다음으로 나를 죽였다 해도 제2, 제3의 장쉐량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일본이 선택한 암살이라는 수단은 정치적으로 결코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즉각 관동군의 짓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건 당시 현장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이라곤 일본 군인 뿐이었습니다. 더구나 일본은 이 사건을 획책하기 위해 남만주 철도를 멈춰 세웠습니다. 이는 열차를 일본이 폭파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 물론 대단히 불쾌했습니다. 일본은 아버지의 원수이자 내 나라의 적이 된 것입니다. 당시 내가 일본에 품고 있던 감정, 그것은 다음과 같은 속담에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원수는 하늘의 원수보다 더 증오스럽다.'"라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정작 장쉐량은 만주의 지배자로 있는 동안 그렇게 적극적인 반일정책을 펼친 바가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